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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일서

요한일서 4장 7-21절 (형제사랑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by ezrabible 2019. 11. 27.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에 대한 정의를 사람들은 정확히 내리지 못한다. 사랑이 어디로부터 발생하였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사도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사랑을 흉내낼 순 있지만 완전한 사랑을 할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정의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사랑의 정의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자기 자신과도 같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죽음 내어준 사실이다.

죄가 없지만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한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거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선행과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악한 행동을 한 원수들을 향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인 강도를 부모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성경은 이와 같은 사랑을 말하고 있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영혼이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흘러 나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므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할 수 있는가?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생각이 동의되고 그에 따른 감정도 작용하며(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가치관)과 감정의 변화로 인하여 우리의 행동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치에 따라서 살고 싶도록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사실에 큰 사랑의 감격과 함께 삶의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그의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서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그의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코람데오. 즉 하나님이 항상 자기 앞에 실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된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천국에 대한 확신을 묻는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당신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인식합니까? 와 같은 질문이다.

실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고, 보이진 않지만 실존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지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러한 사랑의 힘이 어둠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일시적으로 어둠과 두려움에 빠질순 있지만, 그 안에 실존하는 성령님과 하나님의 빛의 힘이 더 크므로 어둠이 영원히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한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가장 큰 증거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믿는 신자도 일시적으로, 오랜기간동안 형제를 미워할 수 있다.

자신이 오해받거나 여러 사람들의 오해속에서 그 오해를 일으킨 형제를 미워할 수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 자녀들이 서로 싸우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금방 화해하고 또 친하게 지낸다.

어른이 되면 싸움 이후에 화해가 힘들다. 이 땅에서는 싸움 이후에 계속적인 화해를 못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꽤 많다.

싸움과 화해를 못하는것과 형제를 미워하는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용서는 일방적으로 할 수 있지만, 화해는 일방적으로 하기에 한계가 있다.

서로 믿는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힘과 권력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잠시 내려놓고 낮은 자를 품어줘야 하거나 하는 등의 예가 있을 수 있다. 또는 심각한 이단사상에 빠졌거나 심각한 교만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쪽이 이러한 측면에 있는 경우라면,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스스로 용서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형제를 용서하고 화합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행한 일이고, 우리에게 이 땅을 살면서 반드시 해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부탁이 아니라 계명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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