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절~18절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요한은 복음서를 시작할 때 시간이 창조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주인공인 예수님을 소개한다. 1절에 ‘태초에’라는 구절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이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셨던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한 그 시점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이 창조되던 그 때 ‘말씀’이 계셨음을 소개한다. 이 말씀이 무엇이길래? 아니 이 말씀이 누구길래 태초로 거슬러올라가서 그 때의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인가? 이 말씀의 존재가치는 그 다음 말씀에 이어진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소개되고 있다. 시간이 창조되던 그 경이한 순간에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다. 이 말씀이 누구길래 창조의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일까? 그런데 1절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에게 놀라움을 시사한다. 그것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창조되던 순간에 함께 계셨던 그 말씀,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증거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이 성경말씀이 다름 아닌 하나님 그분이다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쉽게 대하고 쉽게 믿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이 성경말씀이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복음 1절을 읽은 우리는 더 이상 성경말씀을 가볍게 대할 수도 쉽게 말씀을 지나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가 힘들 때 가끔 읽어야 되는 것이 성경말씀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텍스트로 접하는 이 성경말씀이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며 우리의 전부를 바꿀 수 있는 능력 되신 하나님 그분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말씀이 단순히 그분의 입에서 나온 나와는 상관없는 그분의 명언 정도로만 생각하지는 않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2절에는 다시 한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1절에 한번 언급하였던 사실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곧 소개될 예수님의 신성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수준이 아닌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아닐까? 인생이 생기기 이전에 시간도 생기기 이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셨던 그분의 놀라우신 신성이 이 구절에 함축되어 소개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창조되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분 앞에 우리 인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그분의 놀라우신 창조의 섭리를 묵상하게 된다. 창조의 순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하나님 그리고 여기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의 대화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게 될 것과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을 만날 것도 미리 보시고서 어떠한 생각을 하셨을까? 아니 지금의 내가 이 말씀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아시면서 주님께서는 어떠한 대화들을 나누셨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있기도 전에 나를 아시고 나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주님, 그 주님 앞에 사랑의 감사를 드리게 된다.
3절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 중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은바 되었다. 창세기로 시간을 되돌려보면 하나님께서 6일동안 모든 것을 만드셨다. 그런데 그 지은 바 된 모든 것은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만물의 그 어떤 것도 성자 하나님 없이는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금 이렇게 타이핑 치고 있는 컴퓨터 조차도 보여지는 모든 만물이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도 자녀도 모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존재케 된 것이다. 목마를 때 마실 수 있는 물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도 그 어떤 모든 것도 말씀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누릴 수 있게 된 것인데 내가 그러한 것을 누릴 때마다 그것을 창조하신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은혜를 모르는 행동인 것인가?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먼저는 그것을 주신이를 생각하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삶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순간 너무나 많은 것들을 실제로 주신 예수님은 잊어버리고 실제로 주신 예수님이 아닌 사람이나 다른 것들만 생각하며 감사하는 아쉬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되돌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선물이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만물을 지으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
-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 이 생명이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빛이다.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치었다.
-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명의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 빛이 어둠에 비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은 깨닫지 못하였다.
-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속성이 있는데, 빛 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물리치진 않으셨다.
- 그들로 하여금 빛을 깨닫기를 원하셨고,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6절.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개가 마친 후 요한이 등장한다.
- 그를 보내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셨다.
-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7절.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 그의 사명은 증언하는 것이었다. 증인의 삶이었다.
- 그는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증명하기 위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 또한 모든 사람이 요한 자신으로 인하여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한 삶의 부르심이 있었다.
- 그가 어떻게 행하는지가 그의 사명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된 부분에서 한 사람도 멸망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는가?
- 우리는 영혼을 대할 때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있는가?
- 나는 나를 증언하는 삶을 사는가? 아니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사는가?
-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를 증언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 증언하는 자는 그에 대하여 정확히 상세히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 세례 요한은 이 빛이 아니고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일뿐이라는 분명한 말씀을 보자
- 내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삶이다.
-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의 삶을 증언하고 자랑하는가?
-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삶에서 증언되어야 하지 않는가?
- 부족한 나, 승리한 나, 그저그런 나, 이러한 것이 아닌 오직 승리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이다.
- 이것을 잃었다면 다시금 찾아야 한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
- 사람들의 인정도, 사람들의 사역에 대한 칭찬도 비난도, 그 어떠한 것도 동기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이곳에 증언하고 자 하는 삶의 동기를 가져야 한다.
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진실된 빛이 어둠의 세상에 오셨다.
- 그리고 그 빛은 각 사람에게 비추었다.
-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었지만 이 예수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분명히 비추었다라고 증언되어 있다.
- 모든 영혼들은 분명히 이 빛으로부터 비추임을 직접적으로 친밀히 당하였다.
-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 영혼들을 대하는가?
- 하나님께서 분명히 마음이 굳어있는 자들에게도 빛을 비추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 이곳의 모든 영혼들이 비록 복음은 듣지 못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각자 비추임임을 보이셨다.
- 이제는 말씀으로 그 비추신 빛을 내가 드러내고 알려줘야 하는 의무가 남아 있는 것이다.
- 나는 이 의무에 충성스러운가?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을 지은 창조주가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 이 얼마나 어리석은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가?
-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가 자기 안에 계셨음에도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 어둠은 결코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임을 다시금 보게 된다.
- 어둠은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가 자신을 비추일 때 도망가기 바쁜 것이다.
- 오직 성령께서 어둠 가운데 비추임을 주실 때, 어둠은 그 빛을 깨닫고 회개와 새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 오, 나를 어둠가운데서 건지시고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 이 어리석은 세상이 빛 되신 그분을 알게 되기를 아버지 하나님께 의탁할 따름이다.
-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이 어리석은 어둠가운데 있는 세상이 빛을 깨달아 알 수 있기를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왕 되신 예수님은 친히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신의 백성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영접하다’는 원어로 ‘파랄람바노’인데, ‘파라’는 ‘가까운’, ‘곁으로부터’, ‘근처에’의 전치사로써 친밀히 옆에 있는 것을 의미하며, ‘람바노’는 ‘취하다’는 뜻인데, 능동적으로 ‘~을 잡다’라는 뜻이며 ‘꽉 잡다’, ‘주어지다’ 라는 뜻도 있다. 결국 ‘영접하다’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친밀한 관계로 꽉 잡는다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 같으며, 친밀한 관계로 주어졌다라는 뜻도 가능할 것 같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까이에 아주 친밀한 관계로 내가 꽉 붙잡는 다는 의미가 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까운 사이로 받아들여지는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결국 영접이란 것은 단순히 복음을 시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갔으며 그 이전의 잘못된 관계들은 청산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온전히 빛 되신 그분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의 어둠 가운데 일은 당연히 청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 그것이 영접이 의미하는 바이다.
- 어둠 가운데 있는 백성은 결국 이와 같은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둠을 청산하지 못한 체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친밀해 지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자들, 결국 이전 어둠을 청산하고 새로운 빛 속에서 살아가기로 능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자들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
- 그것은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 그 이름의 뜻, 우리를 죄에서 건지실 그 분, 결국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실 그분, 어둠가운데 있던 우리를 빛 가운데로 옮기실 그 분을 믿는 자들이란 뜻이다.
- 이런 믿음을 구사하는 자들에게는 빛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 이 얼마나 놀라운가? 빛으로 옮기실 뿐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나를 지으신 그 창조주의 자녀의 신분이 된 것이다. 이 권세는 실제로 놀랍다. 나의 아버지가 이제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신 것이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 우리의 새로운 신분이 사람의 뜻이 아닌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와 증언이 있는가?
- 우리는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 비록 지금 육신의 몸을 입고 있지만 이 육신의 몸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 이 생명은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동일한 그 빛을 소유하고 있다.
- 어둠을 비추어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그 놀라운 의의 빛이 있다.
- 이 빛이 내 육신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고 있다.
- 이 빛은 부활의 몸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때까지 이 육신속에 거하며 주님의 영의 양식을 먹으며 날마다 자라고 있다.
- 또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니 빛 자체를 어둠 가운데 증언하는 삶을 살고 있다.
- 아버지 하나님의 빛을 어둠가운데 있는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이 망할 육신 안에 온전히 새로운 빛이 들어왔으며 그 빛이 살고 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 빛으로 보시고 온전하게 보신다. 이 빛은 전혀 어둠이 없고 전혀 손상받지 않으며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때까지 온전히 거룩하게 보존된다.
-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내 안에 이 빛이 있다니..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
- 그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으므로 우리는 친히 그를 볼 수 있었다.
- 그의 영광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나니, 그 영광은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하였다.
-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할 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얘기하고 있다.
- 진리가 먼저 제시되었다면, 그 어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은혜를 먼저 보여주셨고, 그 다음에 진리를 주셨다.
-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세례요한은 그의 부르심 대로 증언하는 일에 충실하였다.
- 그리고 그는 하나 더 ‘외쳐 이르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자기의 사명을 다 할 뿐 아니라 거기에 열정이 더해져서 외치는 일을 세례요한은 하였다.
- 그는 자기 뒤에 오실 이에 대한 소개를 계속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보다 앞선 이유는 자기보다 먼저 계셨다고 증언하였었다.
- 그는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으며, 계속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외치면서 소개하였다.
-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바로 이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무대에 올리는 일을 충성되게 하였다.
- 나는 나를 높이는 일을 하러 이곳에 왔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증언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가? 그 일은 누구에게 우선되어야 하는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에게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내가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임을 다시금 잊지 말아야 하겠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우리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 가운데서 받는 것이다.
- 은혜와 진리가 넘칠 때 우리는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 있다.
- 그 충만함 가운데 있는 것이 은혜 위에 있는 은혜이다.
- 여기서 ‘위에’는 첨가의 의미가 있다. 은혜를 더 강조하는 의미이다.
- 예수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충만함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우리를 무겁게 하고 힘겹게 하는 율법은 모세에게 왔다.
- 그러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힘있게 하고 충만케 하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 우리는 자유하며, 의로우며, 넘치는 기쁨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죄인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이다.
-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즉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 앞에서 은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도와주셨다.
-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죽으셨고, 죄인들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셨다.
-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즉사시키시지 않고, 그들의 죄를 자신이 가지고 죽으시며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히 목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신의 육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봤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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