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순교'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순교자를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도 순교자를 귀하게 여기신다.
순교자들이 받게 될 하늘의 상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시절 교회의 핍박이 심하였을때 순교는 모든 믿는이들이 각오해야할 사항이었다.
그 누구도 피할수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 때문에 순교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자들도 있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순간을 가장 영광스럽게 죽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비록 순교하였지만 그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순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할것이 아닌게 되었다.
정말 그러한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것 같지 않다.
지금은 비록 선교지에서 철수하였지만,
선교지를 처음 떠날때 나는 순교를 각오했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순교를 하고 싶었다.
그 순교자들의 영광속에 나도 합류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선교지가 이슬람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 선교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 '순교'가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에 마음으로 대비하고 있다.
어떤 선교단체들은 '순교'에 대해서 서약서를 쓰기도 한다.
그만큼 이슬람권에서 '순교'라는 주제는 실제적이다.
실제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이슬람권에서 3년간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죽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많은 이슬람권에서 순교당하는 선교사들은 정말 극소수다.
오히려 한국에서 교통사고나 기타 재해로 사망하는 이들이 훨씬 많을것이다.
이슬람권에서 선교하면 IS의 타겟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데, 물론 그럴수 있다.
그러나 IS의 타겟은 주로 이슬람을 믿지 않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오히려 이슬람권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것이 위험한것은 분명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슬람권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한다.
암튼, 나는 이슬람권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생활을 하였었다.
실제 그러한 위험에 노출된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가 있었던 지역이 강경 무슬림지역은 아니어서 그렇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여러번 '순교'의 순간을 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아내'와의 갈등을 통하여 나는 더 높은 차원의(?) 순교를 경험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동감하지 않을수 있지만,
내가 아직 철이 안들고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순교'란 나에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주제였다.
어차피 그들이 나를 죽인다고 협박(?)하고 죽이기로 하였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요구한다면 나의 신앙양심상 절대 그럴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나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나를 죽일것이다.
나의 순교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
나의 순교에 대한 생각은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는것 뿐이었다.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것이었다. 물론 선교지를 간것 자체는 적극적이었지만, 그 순교의 상황에서는 수동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수동적인 '순교'를 경험케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로 하여금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육신을 쳐서 복종케 하고, 성령께 굴복해야하는, 나의 의지를 반드시 드려야 하는 그 '순교'를 경험케 하셨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IS에 의하여 내 목이 베어가는 일은 어찌보면 나에게 쉬운일이었다.
왜냐면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육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성령께 쳐서 복종케 하는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의지를 드려야했고, 주님께 나를 의탁드려야 했으며, 수많은 갈등속에서 피를 토하는(?) 내적인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의 순간을 지나고 나서 나를 성령께 의탁하였을때, 조금 더 주님을 배울 수 있었던것 같다.
이러한 것이 삶에 계속적으로 쌓이게 되면, 정말 영광스러운 순교의 순간에도 주님이 인도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험한 '순교'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것들이다.
'순교자'란 이슬람권 선교지에서만 탄생하는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수없이 도전받고 갈등되는 상황에서 '육신'이 아닌 '성령'께 순종하는 삶.
그것을 '순교자'의 삶이라고 한다면 과한것일까?
오늘 이 순간도 우리는 내적 갈등속에서 '순교자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삶을 수없이 살아낸 많은 그리스도인이 받게 될 영광과 실제 목숨을 받쳐서 죽음에 이르렀던 순교자들의 영광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만 평가하실수 있겠지만, 큰 차이가 없을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순교 당할 수 없는 이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직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언제든지 내 목숨을 주님께 드리는 순교자의 길을 걷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닌것 같다. 주님께서 일상의 많은 순간 속에서 나를 순교자의 삶으로 빚어가는것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삶'을 살아갈수 있기를 오늘도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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